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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포스트] 문용훈 “10년만 하면 좀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30년이 됐지만 아직 많이 못 바꿨어요”

“로비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문용훈(58) 태화샘솟는집 관장과 인터뷰 날짜와 장소를 정하면서 기자는 조금 의아했다. 보통 인터뷰 장소를 알리면 몇 층에 있는 ‘관장실’로 오라고 하는데 문 관장은 ‘로비’로 오라는 카톡을 보낸 것이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날, 오후 2시의 숨막히는 햇살을 받으며 마포구 태화샘솟는집에 이르자 문 관장은 로비에 서서 기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그 로비에서 전용 공간도 없이 근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야 기자는 샘솟는집의 철학을 들으며 문 관장의 결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 관장은 원래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80년대 중반 군에 입대했는데 같은 부대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문 관장에게 “대기업 손녀를 사귀고 있는데 그쪽 집안에서 반대를 해서 잠시 군대로 도망을 왔다”라고 이야기했다. 매일 밤, 같은 레퍼토리의 이야기였다. 게다가 부대에 신병이 오거나 전입된 이들이 오면 “그들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서”라고 망상에 사로잡혀 말했다.

문 관장은 직속 상사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시절, 정신질환은 이해되어지지 않는 숨겨야 되는 ‘낙인’의 표상이었다. 상사는 “네가 알아서 해”라고 말했다. 그 동창은 그렇게 이질적인 존재로 지내다가 결국 의가사제대를 했다.

제대 후 문 관장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그 동창의 상황을 물었다. 그리고 동창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황망했다. 그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어디에도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다시 대입시험을 쳐서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했다. 84학번이었던 그는, 89학번으로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사회복지학 커리큘럼에 ‘정신장애’ 영역은 없었다. 지역사회 기반의 정신보건 역시 부재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 생긴지 5년쯤 되는 태화샘솟는집에서 인턴을 모집하는 걸 보고 지원했다. 이후 그는 30년을 ‘샘솟는집 지킴이’로 살아왔다.

1995년 정신보건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문 관장은 정신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았다. 깨달음의 최종적 확인은 고난당하는 민중,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삶의 헌신일 것이다. 약자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의 편에 선다는 건 단지 신학적 주제가 아니라 약자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연민을 가진 총체적 인간의 실천적 행동을 필요로 한다. 그는 깨달았을까.

2002년 관장의 자리에 오른 그는 샘솟는집 공간 접근의 ‘평등성’을 위해 관장실도 직원실도, 회원실도 다 없앴다. 모두에게 평등한 공간,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으로 샘솟는집을 재설계했다. 그건 클럽하우스 철학을 가진 샘솟는집의 또다른 평등성에의 실천이었다. 그는 그래서 기자에게 ‘로비’로 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지난달 20일,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 일답. (인터뷰에서 기자는 태화샘솟는집을 ‘샘솟는집’으로 줄여서 표현했다-편집주)

문용훈 태화샘솟는집 관장. (c)마인드포스트.

-클럽하우스라는 게 뭡니까?

“클럽하우스 하면 나이트클럽이나 골프 클럽을 많이 생각하죠. 우리나라도 과거에 무슨 구락부(俱樂部) 이런 것들이 많았어요. 영어로 클럽이라 쓰기 어려워서 일본어처럼 쓴 게 구락부거든요. 클럽하우스는 생각을 같이 하거나 어려움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모임이라고 보시면 돼요.”

-정신장애 외에도 다른 장애도 클럽하우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겁니까?

“그건 그쪽 기관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틀리겠죠. 우리나라 장애영역이 15개인데 외국은 중분류처럼 돼 있어요. 우리는 소분류처럼 돼 있어서 정신장애라고 하면 정신질환인 분도 있고 지적장애인들도 있죠. 그냥 발달장애인들을 모아서 정신장애라고 표현을 많이 하거든요. 이탈리아는 장애인, 정신과적 어려움이 있는 분들이 같이 지내는 곳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회복하는 과정을 돕고 있지 않습니까? 클럽하우스가 이게 소테리아하우스나 다른 유형의 정신재활시설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어요. 병원 내 자조모임에 참석했던 회원들이 그 모임이 좋았던 거예요. 그걸 지역사회에서 해보자 한 거죠. 지역 모임을 하면서 우리 이름을 뭘로 지을까? 클럽으로 모여서 진행을 하자. 이렇게 해서 클럽하우스가 시작됐죠.

그럼 또 우리가 뭘 할까? 미국은 혼자 살거나 노숙하는 분들도 많으니까 한 끼 식사라도 제대로 와서 했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식사를 만드는 부서를 만들자. 그래서 1달러만 가지고 오면 누구든지 한 끼를 배불리 먹게 하자. 그러다가 건물이 필요하게 되죠. 건물을 임대했더니 우리 건물이니 잘 관리하면 좋겠다. 그래서 부서가 만들어지죠.

기존 모델들이 전문가가 자기가 잘하는 사업들을 진행해서 거기 참여하는 모형이라면, 클럽하우스는 실제 이용하는 회원들이 삶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가지고 부서업무로 만들어왔다고 보면 됩니다. 최종 형태는 비슷할 수 있지만 시작 자체의 공간이 굉장히 틀리기 때문에 철학적인 것들이 차이가 있는 건 맞아요.”

-미국에서 그렇게 시작한 시기가?

“1940년대입니다. 미국은 정신건강센터 관련 법이 1961년에 만들어졌는데 이 모임은 194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어요. 샘솟는집도 1986년에 시작했거든요. 1995년에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같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던 거죠.”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사회복지시설이라고 하는데요.

“맞습니다. 1986년에 이 공간에서 샘솟는집을 운영했죠. 그런데 1976년에 마라톤클럽이라고 정신과적 어려움이 있는 이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있었어요. 저는 샘솟는집의 전신을 1986년이 아니라 1970년대로 봐요.

당시만 해도 사회복지 쪽에서 그때 용어로 ‘정신박약’ 등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사업을 쭉 했죠.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그건 다른 데서 많이 하니까 샘솟는집이 관심을 갖고 한 게 마라톤클럽이었어요. 이걸 진행하면서 1978년에 마음건강상담실도 만들었고 이용자들을 위해 제대로 된 공간을 갖고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개방형 요양시설을 할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미국에 연수를 갔던, 지금은 은퇴하신 김정진 교수님이 거기서 클럽하우스 교육을 받고 한국에 적용했으면 좋겠다고 권했죠. 그래서 당시 마라톤클럽을 진행하고 있던 감리회 태화복지재단에 편지를 써서 펀딩을 했어요.

1985년에 재단이 도움을 주면서 불규칙적으로 진행됐던 마라톤클럽을 정기적으로 모일 수 있는 장소인 샘솟는집이 1986년에 만들어지게 됐죠.”

-1986년 개소할 때 주민 반대가 상당했었다고요.

“86년에도 있었고, 90년대도 있었고, 이 건물을 짓고 들어온 2010년도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전관(全館)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여기가 유치원 건물이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유치원하고 우리 회원들이 같이 이용한다고 하면 지역주민이 더 반대를 했을 텐데 그때는 오히려 유치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의 한 층을 우리가 사용하는 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슬쩍 발 들이기 전략으로 사업을 시작하고 1987년에 마지막 유치원생들이 졸업하면서 전관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물론 주민들이 연판장을 돌리는 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역주민들이 반대를 하기도 했죠. 이 건물을 저희가 지을 때도 주민들이 들어오기 전에 먼저 들어왔거든요. 1년 먼저 지었어요, 주민들 들어오기 전에.”

-그때 허허벌판이었습니까?

“막 공사를 하고 있었죠. 정신과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주민들이 잘 접촉하지 못 하잖아요. 기사나 방송의 왜곡된 시각으로만 접촉을 하니까요. 사람이 잘 모르면 두려움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래서 93년에 지역주민을 과감하게 기관에 초청해보자. 타깃을 잘 잡아야겠다 해서 노인정 어르신들을 초청해서 식사 대접을 해드리고 영상도 보여드리고 우리 회원들이 서빙도 해드렸죠. 이걸 몇 년 하다 보니까 부녀회에서 점심 만드는 걸 자원봉사해 주면서 폭이 넓어졌죠.

2010년 건물 지었을 때도 주민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아파트 단지에 이런 위험한 시설이 들어올 수 있느냐라는 글들이 돌았어요. 그래서 이 지역 7개 교회 목사님들과 전도사들을 초청해서 우리 기관을 오픈했고요. 필요하면 제가 교회에 가서 설명드리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노력을 하니까 여기가 그렇게 위험한 곳이 아니다. SNS에서 굉장히 부정적이고 무섭다는 감정을 가졌는데 이후 ‘같이 살 수도 있네, 두려운 사람이 아니네’라고 바뀌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지역주민 초청 잔치도 10년 정도 했어요. 당시에 제가 밖에 나가면 ‘문 관장 들어와’ 해서 차 한 잔 마시고. ‘요즘 힘든 일 없어?’라고 물어주고. 그렇게 바뀐 거죠. 긍정적인 접촉을 하는 시간이 있었고 우리 회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교육도 진행하고요. 그러다보니까 여론이 바뀌어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용훈 태화샘솟는집 관장. (c)마인드포스트.


-요즘은 인근 가게 주인이 물건 사러 온 회원 얼굴을 보고 오늘 건강에 좀 안 좋은 것 같다는 거 알려준다면서요.

“맞습니다. ‘요즘 그 회원은 잘 안 오는데 왜 안 오는 거야’ 이렇게 말씀도 하죠. 코로나19로 지역사회 커뮤니티가 많이 무너졌잖아요. 대면도 못 했는데 요즘은 대면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다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어떤 기관이 새로운 곳에 가거나, 거기가 재개발이거나 하면 좀 다른 접근을 할 필요는 있어요. 재개발할 때 저희가 정주민(定住民)이잖아요. 지역에서 원래 살던 분은 재개발이 되니까 10%밖에 없어요. 90%는 다 외부에서 오는 거예요. 이분들 전혀 저희를 모르죠. 그래서 그때 형성된 여론, 그때의 어떤 접근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 경험상 그 타이밍을 잘 맞춰서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해요.”

-샘솟는집으로 1992년도에 오셨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당시에는 정신건강 사회복지란 과목 자체가 없었어요. 사회복지학과에서 의료사회사업 이런 것만 배웠죠. 정신건강이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 전에 실습지도 다 병원밖에 없고 지역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샘솟는집에서 인턴을 모집했어요. 인턴 지원하면서 이제 좀 바꿔보자 싶었죠. 단순히 의료적인 생각으로 이분들이 다 병원에 있을 건 아니기 때문에요. 10년만 하면 좀 세상이 바뀔 줄 알았는데 30년이 됐지만 아직 많이 못 바꿨어요(웃음).”

-들어오실 때 정신장애인을 위해서 청춘을 바치겠다 이런 각오로 들어오신 겁니까.

“저는 아직도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샘솟는집에 있다가 그만둔 이들이 ‘청춘을 바쳤다’고 얘기를 해요. 맞아요. 그런데 그분들이 근무한 건 10년이 안 되고 저는 30년이 넘는 건데 저는 아직도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2018년 서울시사회복지사협회에서 주는 아름다운사회복지사상 받을 때도 한마디 하라 해서 ‘저는 아직 청춘’이라고 그랬습니다. 아직도 회원들하고 같이 해야 할 것도 많아서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샘솟는집은 장애인 등록을 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습니까.

“그렇죠. 정신장애인의 장애등록이 2000년도부터였잖아요. 2000년 이전에는 100% 장애인 등록 안 하신 분들이죠. 2000년에 장애인복지법 바뀌었을 때 정신질환 장애인들을 7만 명 정도 예상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11만 명 가까이 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더 늘어나죠.

저희 기관도 150명 정원에 138명이 장애 등록했어요. 그런데 등록하지 않고 이용하는 분이 35명 있어요. 그분들을 위해 어떤 걸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취업을 하고 싶어도 장애등록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요.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일을 많이 하잖아요. 어플로 할 수 있는 업무들도 개발해서 회원들이 장애등록 안 하고도 일할 수 있게 했어요.”

-여기를 이용하면 이용료를 내야 합니까.

“1년에 30만 원입니다. 한 달에 2만 5천 원. 비회원들도 30만 원 내고요. 아까 얘기한 대로 등록 안 하신 분들은 등록비를 안 내죠.”

-그분들은 그냥 이용하시는 거예요.

“그분들은 필요한 내용들만 이용하시니까요.”

-그러니까 등록 장애인들하고 좀 다른 어떤?

“샘솟는집에 등록하려면 1년에 30만 원을 내고요. 전체 회원 중에 3분의 1 정도가 수급자인데 그분들은 안 내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면 감면도 해드리고. 점심값이 3천 원인데 그것도 내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저희가 후원을 받아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관장실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짜 없네요.

“두 가지 이유인데요. 오늘도 20년 전에 다녔던 회원분이 전화해서 오겠다고 했어요. 65세 정도 되는데 그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왔는데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쑥스럽죠. 그럼 안 되니까 저랑 차도 마시고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도 나누고 하는 게 필요하죠. 여긴 환영받는 곳이니까요. 그게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저희 기관이 가진 철학이 있습니다. 기관을 이용하는 데 평등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공간 접근의 평등성이에요. 그래서 직원만 이용하는 공간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있었는데 제가 관장이 되고 나서 다 없앴어요. 관장실도 없어요. 굳이 필요하면 제가 노트북 가지고 일을 하면 되고요.

갑자기 회원분들이 얘기하자고 그러면 저도 노트북 끄고 나옵니다. 저뿐만 아니라 샘솟는집은 직원실이 없어요. 전체적으로 같이 다 이용하는 거죠.”

-95년 정신보건법 제정할 당시에 관장님은 뭘 했습니까?

“당시 정신보건법 관련 토론회가 국회에서 진행됐어요. 그때는 가족회도 별로 없었고 당사자회는 당연히 없었죠. 토론회를 가면 ‘아니 정신질환 있는 사람들이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게 가능해?’ 이런 질문을 해요. 지금은 말이 안 되지만 그런 질문을 받을 때예요.

샘솟는집 회원과 가족들이 가서 약간만 지원받으면 충분히 지역에서 지낼 수 있다고 했어요. 어머니 한 분은 작성해 온 원고를 눈물을 흘리며 읽었어요. 법을 꼭 통과시켜달라. 이 법이 통과가 안 되면 다시 시작해야 된다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입·퇴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거기에 대한 비판 같은 건 없었습니까.

“입·퇴원에만 관련된 법이고 지역사회 관련 내용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그때 (민주노동당) 곽정숙 의원이라고 있었어요. 그분이 비례대표가 돼서 저한테 전화를 한번 했어요. 국회에 좀 들어와서 정신보건 관련된 이슈를 얘기해달라고.

제가 그때 국회의원 무서운 거 모르고 궁금하면 나오시라고 그랬어요. 궁금하시면 직접 오시라고. 왜냐하면 의원실에서 얘기하는 것보다 실제 회원들을 만나고 가족들도 만나고 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라고 생각한 거죠. 그랬는데 곽 의원이 진짜 왔어요. 저희 기관에서 회원과 가족, 교수, 의사도 오시라고 해서 간담회를 한두 시간 했어요.

곽 의원이 정신건강, 정신질환, 정신장애인에 대해 꼭 사업을 하겠다 약속을 하고 갔습니다. 그분하고 작업한 게 당시 국회 국정 질의 때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정신질환이 있으면 자격증을 못 따는 걸 알고 있느냐 이렇게 질의했습니다. 장관이 TF팀을 만들어서 보고서를 내겠다고 했어요. 그게 최초의 보고서일 거에요.”

-몇년도죠?

“2000년대 중반 정도. 최초로 그 연구를 하고 또 지역에서 자격증 문제를 해결하려 했어요. 한꺼번에 다 바꿨으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 43개 조항만 먼저 개정안을 마련해서 두 가지가 바뀌었죠. 문화재 수리하는데 정신질환이 있으면 못 하는 거, 양어장·양식장 할 때도 정신질환이 있으면 안 됐죠. 이 조항들을 없앴어요.”

샘솟는집 로비. 문 관장은 이곳 구석에 책상 하나를 두고 일을 하고 있다. (c)마인드포스트.


-그때는 40여 개에서 지금 27개로 줄어들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더 늘었잖아요. 자격증 못 받는 게 더 많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래서 43개에서 2개가 없애졌는데 다른 법들에서 자꾸 직업들이 많이 생기니까 그냥 옛날 법을 그대로 갖고 들어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자격증에서 안 되는 예외조항을 자꾸 옛날 법에서 갖고 들어오다 보니까 늘어나는 거예요. 43개에서 2개밖에 안 없어졌어요.”

-지금까지 말입니까?

“그렇죠. 적극적으로 대처가 안 된 거죠.”

-27개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틀려요. 자격을 못 딴다는 예외적으로 두는 게 하나 있고요. 두 번째는 이 자격증을 따는 데 이 조항을 갖추면 딸 수 있다, 이런 게 있어요. 다 포함해서 생각해야겠죠.

예를 들어 의사의 소견서를 내면 (자격증을) 받게 하거나 이런 조건을 단 것까지를 다 해결된 것으로 보면 그렇고요. 사실은 그 행위를 할 수 있으면 자격증을 따는 거지, 조건을 다는 것 자체는 완전히 배려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요.”

-90년대 당시에는 강제입원이 굉장히 폭력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강제입원 당하는 당사자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90년대 중후반에 공동생활가정을 하기 위해 그 대상을 탈시설로 잡았어요. 저하고 직원들하고 정신요양시설이나 큰 병원에서 많이 쫓겨났어요. 그래서 정신요양시설에서 20년 있었던 분, 병원에서 10년 있었던 분 등 네 명에게 당시 정부 보조도 안 받고 임대 아파트까지 했어요.

그때 샘솟는집 내부에 거주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럼 24시간 여기 내부에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안 되겠다, 주간에 이용하면 무조건 저녁에는 밖에서 왔다갔다라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 거주지를 밖으로 빼는 작업을 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폭력적이었고 회원들 얘기를 들으면 끌려가는 것도 굉장히 많았고 지금처럼 여러 (입원 적정성의) 심사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노엽지는 않았습니다.

“한번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같이 나가자고 해서 요양시설로 갔는데 진짜 열악했어요. 요양시설 가보셨어요? 지금은 생각보다 좋아요. 그 당시는 훨씬 나빴어요. 지금은 정신요양시설보다 정신병원이 더 열악한 데가 많아요. 그래서 국공립병원이나 조금 잘 된 병원을 제외하고 정신병원 가면 지금보다 입원 병동 더 나쁜 데도 많습니다.

그게 코로나19 때문에 완전히 드러나게 된 거죠. 한 방에 10명씩 매트리스 깔고 자도 문제도 안 됐죠. 그래서 정부가 의료기관이 (권고) 기준에 맞춰서 정리될 거라고 2019년도에 발표했는데 저는 정신재활시설도 그렇게 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정신재활시설은 4.3㎡에 한 명이 이용할 수 있게 돼 있어요. 거주시설도 마찬가지인데 4.3㎡ 기준을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1960년대에 만들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옛날 기준을 왜 안 없애느냐? 공공기관의 습성 같아요. 그때 그걸 만들었기 때문에 근거가 있는 거고 과거에 만든 거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최저 기준안을 10년마다 발표하는데 지금은 1인당 14㎡에요. 그것도 굉장히 낮죠. 일본 25㎡, 유럽이 23㎡, 우리나라의 인구 1인당 33㎡인데 왜 우리는 4.3㎡으로 있어야 되죠?

샘솟는집 건물을 지을 때 사람들이 저한테 그랬어요. 건물이 큰데 왜 정원을 150명밖에 안 하느냐. 600명 할 수 있거든요. 안 한다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왜 그 4.3㎡ 기준을 가지고 사람들을 제약해야 되냐라는 거죠. 이제는 우리가 밖에 나가서 하는 활동들이 많고 취업장도 저희는 70~80명 정도 일을 하고 있지만, 와서 안락한 기분이 들어야 되고 혼자 있을 때도 있어야 되고 그렇잖아요.”

-1992년 인턴으로 들어와서 사회복지사, 선임 사회복지사, 과장, 부장, 관장이 됐습니다. 관장님을 이끌었던 삶의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희가 종교 법인이니까 철학 중 하나는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입니다. 두 번째는 제가 재주가 없어요. 사람들이 저에게 왜 이렇게 오래 일하냐고 물으면 딱히 얘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처럼 제가 재주가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라고 하죠. 당시에 저랑 같이 일했던 사람 다들 교수님 됐잖아요. 제가 교수로 갈 것도 아닌 것 같고, 또 학교 강의도 그때 했었는데, 그걸 좋아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왜죠?

“그게 좋은 거예요. 학생들이 교수님이라고 그러고 ‘나 교수 아니다’ 얘기해도 그렇게 분위기가 좋고 가르치는 게 좋았어요. 그런데 이걸 좋아하면 내가 우리 회원들 삶에 같이 몰입을 하지 못할 거 같아서요.”

-종교가 개신교이십니까.

“교회를 다닙니다. 하여간 학교 강의를 저는 후배들이 할 때는 강의하러 가라고 하는데 저는 안 합니다.”

-샘솟는집에서 정신장애인을 회원으로 부른다고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기는 직원만의 공간도, 회원만의 공간도 없어요. 또 의사결정을 하는 데 직원과 회원이 동등한 권리가 있고 일을 하는데도 동등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회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사회가 나이가 있는 분들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화돼 있어서 논의를 했어요. 어느 선부터 선생님이라고 부를까.

과거에는 회원들이 젊었단 말이에요. 평균 연령이 한 35세? 그래서 40세도 되면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했죠. 근데 저는 그 당시에 너무 젊다 이 생각을 했어요. 지금 회원들 평균 연령이 43.3세예요. 그래서 회원들하고 올해 초에 상의해서 결정했죠.

우리가 40세부터 하면 반 이상이 선생님인데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냐. 그리고 내가 버스를 탔는데 선생님 여기 앉으세요, 이렇게 하면 사람들 다 쳐다본다. 지금은 만 50세에서 만 55세로 이렇게 올렸어요. 회원들하고 합의해서.”

-선생님은 만 55세 이상으로, 나머지는 그냥 이름을.

“무슨 무슨 씨. 그런데 용훈 씨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나이가 아무리 많고 적더라도 문용훈 씨 이렇게 풀네임(Full Name)으로 같이 부르자. 그래야지만 들을 때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겠죠. 그래서 회원분들도 저희 직원 부를 때 무슨 무슨 씨 이렇게.”

-님이 아니고.

“네. ‘~씨’라고 다 그렇게 부릅니다.”

문용훈 태화샘솟는집 관장. (c)마인드포스트.



-관장님께서 최저임금 예외조항 폐지를 주장하셨어요. 그게 아직 폐지 안 됐잖아요

“안 됐죠. 최저임금 예외조항의 대상이다 보니까 정신건강 영역에 있는 직업재활시설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이 최저임금을 못 받고 있어요. 저는 취업 담당을 꽤 했었는데 취업장을 개발하고 우리가 가서 일을 하는데 업체에서 마지막에 ‘그러면 우리한테 뭘 해줄 수 있습니까?’ 물어요.

1990년대까지 분위기로는 ‘우리는 싸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거였어요. 저는 그게 이해가 안 갔거든요. 일을 하면 똑같이 받아야지. 제가 관장 되고 난 이후에 최저임금 안 주는 업체는 다 버리라고 했어요. 거래를 최저임금 이상 주는 쪽으로 하자. 유엔 장애인권리협약(CRPD)에도 나와 있지만 최저임금을 폐지하는 대신 국가에서 임금 보존 정책을 하도록 돼 있어요.

우리가 그 정책을 안 하고 있다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장애인을 고용하면 돈이 어디로 가냐면 법인으로 가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을 하면 장애인을 고용한 걸로 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 고용장려금이 어디로 가냐면 법인으로 가요. 그럼 법인에서는 이 돈은 어떻게 써도 상관이 없어요.”

-부정부패도 있을 거 아니에요.

“이 돈을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에 줘서 실제 급여로 써라 이거에요.”

-당사자한테 직접 줘야 된다?

“제가 계속 주장하는 게 최저임금을 폐지하든가 최저임금에 대한 예외조항에 대한 보조금 정책을 바꾸든가, 그거를 직접 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인에게 가게 하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아무것도 안 되고 있는 상황이 답답하죠.”

-법인은 어디를 말씀하신 겁니까?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을 하잖아요. 시설은 인격이 없어요. 그냥 시설이잖아요. 인격은 사람이나 법인이죠. 그러면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이나 장애인 고용 관련해서 법인이나 사회적협동조합, 사회적기업으로 가죠. 그런데 이 돈은 꼬리표가 없어요. 실제로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받은 거고 장애인 고용해서 받은 건데. 그냥 알아서 쓰는 거죠.

그게 아니라 실제로 쓰라는 거죠. 가장 좋은 건 최저임금 예외조항을 폐지하고 이분이 100을 일해야 하는데 50을 일한다면 50만큼 급여를 국가에서 보존을 해 주는 거죠.”

-법인으로 가는 게 아니고요.

“그렇죠. 두 번째는 지금처럼 보조금 받는 걸로 한다면 그걸 법인에 주지 마라. 아니면 법인에 줄 때 꼬리표를 달아서 임금으로 가게 해라. 그렇게 해서 실제로 일을 하는 장애인들에게 혜택을 가게 하는 게 맞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아까 공동생활가정 말씀하셨는데, 정신재활시설 유형 중에서 공동생활가정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바꿔야 될까요.

“저는 거주시설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했거든요. 서울시에서 지원주택이라는 걸 할 때도 굉장히 공격을 받았어요. 첫 번째는 시설을 운영하는 분들은 혹시 이게 시설을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고, 두 번째는 지원주택이라는 것 자체가 정신건강 영역에서 가능하냐?

이렇게 공격을 받으면서 관련 조례 만들 때 어려움이 있었어요. 조례를 만들고 나서 제가 할 거라고 오해가 있었는데 저는 ‘3년 동안 안 하겠다. 여러분들이 제대로 운영하시라’고 했었죠.”

-거주시설 패러다임의 변화란 게?

“저는 본인이 살고 싶어하는 곳을 본인이 선택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공동생활가정도 그렇고 일부 지원주택도 장소나 이런 것들을 제한하잖아요. 그건 주거 패러다임에 안 맞는 게 아닌가. 과거에는 공동생활가정이 효과적이었고 소규모고 지역 가까이 있었죠. 대형 시설보다는 더 지역사회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건 집단생활이잖아요. 규정들도 까다롭고요.

그것보다는 본인 이름으로 주택을 등록하고 내가 살고 싶어하는 데서 필요하면 서비스를 요청하는 게 맞다. 이렇게 사회가 바뀌어가야 하지 않을까.”

-지금 말씀하신 게 전환시설.

“지원주택이라고 합니다. 지원주택은 두 가지인데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거는 시에서 SH(서울주택도시공사)랑 연결해서 집을 얻어서 본인이 계약해 살고 서비스를 받는 건데 그것도 주거 선택권에서는 제한이 있죠. 나는 종로구에 살고 싶은데 지원주택은 송파구에 나왔어. 그럼 나는 송파로 가야 되잖아. 그렇기 때문에 주거 선택권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요.

2001년 장애인 실태조사를 보면 주거 복지의 가장 대표적인 게 영구임대아파트잖아요. 근데 장애인 전체적으로 영구임대 아파트를 이용한 비율이 7.56%밖에 안 돼요. 이것도 오른 거예요. 2017년도에는 4.4%였어요. 2배 정도 는 거죠. 정신장애의 경우 2017년도에 8.8%였어요. 지금은 19.8%로 올랐어요.

그러니까 내가 거주하는 건데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어요. 왜냐하면 영구임대아파트 가려면 기초생활수급권자여야 되고 주거 약자여야죠. 한편으로는 이만큼만 이용하는 게 좋지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또 어두운 면이 있어요. 주택을 받고 서비스 선택권을 다양하게 해서 이분이 지역에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죠.”

샘솟는집에 마련된 쉼터 형식의 방. 누구든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면 누워서 쉴 수 있도록 구조돼 있다. (c)마인드포스트.


-관장님이 디지털 시대의 치료 주도권이 서비스 이용자에게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말씀하셨어요. 디지털하고 당사자 서비스하고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저는 2011년에 정신건강의 3차 혁명 시대라는 걸 발표했어요. 호응이 없었습니다(웃음). 정신건강의 1차 혁명은 약물의 발견입니다. 두 번째는 탈시설과 인권에 대한 접근이죠. 세 번째는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면서 정신건강에 관련된 정보가 일반화됐어요.

그 다음에 그 결정권들이 당사자한테 넘어가고 지역에서 상호 의존해서 살아가는 시스템으로 바뀔 거다. 디지털 시대의 보편화가 되면 그렇게 될 거다. 그렇게 예측을 했어요. 지금 그런 시기가 된 것 같아요.

이제는 비교할 수 있지 않아요? 내가 어느 병원에서 누구를 만나는 거랑 다른 분들 만나면 비교할 수도 있고, 어느 시설에 어떤 서비스가 있는 걸 비교할 수 있고, 어느 지역에 뭐가 있고 어느 지역에 뭐가 없는 것도 있고 정책이나 제도도 비교할 수가 있잖아.

그래서 요구를 할 수가 있잖아요. 그걸 전에는 제가 하니까 제가 무슨 이해관계자처럼 돼 버려요.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권한이 당사자 쪽으로 넘어가고 그들하고 연계를 한 지역주민, 지역사회에 있는 여러 단체들하고 같이 넘어갔어요. 그래서 공동체적인 것을 잘 형성해서 상호 긍정적인 의존들을 서로 해나가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예측이 듭니다.

2019년에 정말 이해를 못 했던 게 어르신이 되거나 장애인이 되면 ‘투지폰’을 쓰라는 거예요. 옛날 핸드폰을요. 이해가 안 갔거든요. 최신 핸드폰을 터치를 적게 해서 사용하는 게 맞다. 그래서 2020년도 2월에 전체 사회복지시설들을 다 셧다운(일시적 폐쇄)하라고 했을 때 이런 공문이 내려왔어요. 매일 전화해서 ‘약 잘 드십니까? 열이 있으십니까?’. 근데 회원들도 매일 전화해서 똑같은 질문을 하면 짜증 나지 않을까?

그래서 직원들 다 모여서 우리가 바꾸자. 그 당시에는 마스크 주거나 손 소독제 등을 주는 거였어요. 그래서 왜 데이터를 안 주냐. 그다음에 데이터 때문에 회원들이 스마트폰을 안 사용하는 거예요. 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데이터를 보내서 우리의 소식들을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하고 가상의 공간에서 사람을 연결하는 것들을 하자. 두 번째는 우리 회원들이 이런 스마트폰을 거의 안 사용하고 있어서 다 바꿔주는 작업을 하죠.”

-옛날 그 투지폰을 스마트폰으로.

“그것도 힘든 분이 있어요. 스마트폰이 작기 때문에. 그러면 큰 화면을 해서 우리가 빌려드려요. 인터넷 관련된 것들에 대한 접근성을 강화하는 게 굉장히 필요한 일이죠. 2020년도에 그와 관련된 업무들 하고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복지시설도 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온택트사회복지’라는 책을 만들어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게 했어요.

회원들하고 같이 3개월 동안 해봐서 바뀐 내용이었거든요. 지금은 일반화됐지만 그 당시에는 그랬어요. 지금도 아침에 제가 전체회의를 하거든요. 처음에는 유튜브를 했었는데 유튜브로 하니까 일반 사람들이 다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밴드 내에서 제한된 사람들이 하는 메타버스 같은 내용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전체회의를 합니다. 그날 소식도 나누고 출근 안 하는 35명이 오늘은 이걸 받고, 출근하면 여기서 보고. 그럼 통계가 나오거든요. 보면 163명 중에서 128명이 밴드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럼 안 하고 있는 분들을 찾아서 왜 안 하는지 파악을 해보자. 사업 자체가 근거나 통계를 바탕으로 해서 소외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인터넷 기반의 사회가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장애 분류 기준을 벗어나 서비스가 필요한 계층에 대한 개념을 도입해라. 이를 위해서 F 코드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조금 더 설명해주시면요.

“2021년에 국가인권위에서 정신장애 실태조사 할 때 썼었는데 굉장히 반대가 많았어요. 기존의 장애등록을 받는 사람도 서비스를 다 못 받는데 이걸 넓히게 되면 서비스의 총량이 적어지는 게 아니냐라는 반대가 굉장히 컸습니다. 인권위 보고서를 보면 이 제안 내용이 빠졌을 거예요. 밀린 거죠.

그런데 저는 앞으로 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우리나라는 ‘올 오아 나싱(All or Nothing)’이니까 장애인 등록을 하면 전부, 등록하지 않으면 나싱, 아무것도 못 받는 거죠. 이런 제도는 있을 수가 없는 게, 왜냐하면 중간 단위가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지적장애인의 기준이 75다 그러면 70은 못 받잖아요. 80도 못 받아요. 근데 이분이 사회생활 잘할 수 있냐? 이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근데 우리는 딱 이렇게 판단해서 수급에 대한 내용들을 규정하느냐는 거죠.

저는 서비스가 필요한 내용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장애등록을 하지 않아도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되고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되고 내가 가서 교육은 받을 수 있어야지 그거 자체를 막는 건 저는 이해가 안 되죠. 필요한 서비스를 받아야지 그게 등록으로 가면 안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신요양시설을 폐쇄해야 된다라고 요즘 목소리가 많이 나옵니다. 대신에 이걸 노인 요양시설로 바꾸자 이런 얘기도 나오는데 관장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많은 분들이 그쪽의 예산 지원 방식을 바꿔야 된다는 얘기를 많이 하죠. 저도 대형 시설에 대한 것들은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근데 깜짝 놀랐어요. 옛날 80년대에 부산의 형제복지원 입구에 있는 그 간판을 보신 적 있어요?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이 형제복지원의 간판이요, 자립이에요. 자립. 그 당시에도 자립을 위해서인 거예요.

그래서 아 이때도 그랬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대형 시설들을 없애는 것 자체는 저도 찬성을 하는데 한번 제대로 파악을 해보자. 저는 2014년부터 얘기를 했습니다. 요양시설에 있는 분들은 뭐예요? 보장시설이에요. 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보장시설인데 그게 뭐냐면 기초생활 수급인 사람이 보장시설에 들어가면 본인이 수급액을 안 받잖아요.”

문용훈 태화샘솟는집 관장. (c)마인드포스트.


-그렇죠. 그쪽 시설이 받겠죠.

“그쪽 요양시설이 받죠. 왜 그렇게 하냐? 이해를 못 하죠. 본인한테 주라는 거예요. 그래서 본인이 그 돈을 받아서, 물론 숙식을 제공하니까 약간 적게 받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받아서 그 돈 갖고 내가 사용도 하고 필요하면 밖에도 나가서 쓰고 그렇게 해야지 그걸 다 요양시설에서 관리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만일 본인이 결정하기가 어렵다면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자기결정권을 강화한다면 요양시설은 당연히 지금보다는 새로운 형태로 가요. 그걸 저는 2014년도에 얘기했어요. 두 번째는 노인요양시설로 전환하라고 그러는데 지금 정신요양시설에 가서 보면 과거보다 연세 있는 분이 많이 생겼어요.

2002년도에는 65세 이상이 4%밖에 안 됐어요. 지금은 20~30%예요. 그렇기 때문에 장기요양급여로 가라는 건 현재의 정신요양시설의 기능을 가지고는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 전원 조치해버린 상황이에요.”

-전원이 무슨 말씀이시죠.

“요양병원으로 보낸 상황이죠. 그래서 저는 2008년도 이때부터 정신요양시설에다 기능 보강을 줄 때 아예 한 동이나 한 층을 장기요양급여를 받고 운영할 수 있는 쪽으로 환경을 바꾸라고 여러 번 제안하고 발표했습니다. 안 받아들여요.

근데 이제는 필요성들이 생긴 거예요. 당시에 65세 이상이 2.3%밖에 안 됐다면 지금은 20~30% 됐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들고요. 그렇게 되면 요양시설의 어려움에 변화의 방향성들을 제공하는 거죠. 첫 번째는 본인이 선택해서 돈을 쓰게 해라. 두 번째는 기능 보강을 내릴 때 미래를 보고 하라. 한 동이라도 먼저 바꿔보고, 그쪽으로 필요한 분들은 이동하게 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요양시설들이 지금의 형태로 운영하기가 어려워져요.

왜냐하면 정신요양시설 정원이 1만3500명 정도 돼요. 현재는 8천 명대예요. 저는 요양시설협회와 중앙지원단에서 모여서 세미나 때 발표했어요. 요양시설 정원이 8천 명이 무너지면 현재 요양시설은 운영이 불가능하다. 그 안에 바꿔야 되고 그건 제가 보기에 2025년까지가 데드라인이다. 그렇게 발표를 했는데 그 당시에는 9천 명 정도 있었으니까.”

-8천 명 아래로 떨어지면 왜 운영이 불가능하고 문 닫아야 됩니까.

“일단은 현재의 시스템으로 운영하기가 어렵죠. 왜냐하면 입소자 중심으로 예산 지원을 가기 때문에 그렇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거예요. 제가 2025년까지가 황금의 시간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장애인권리협약에도 가입돼 있지만 국제노동기구(ILO)에도 가입이 돼 있잖아요.

그래서 국제노동기구도 장애인권리협약과 마찬가지로 국내법과 동일한 효과를 갖다 보니 그 법에 의하면 노동 시간을 지켜야죠. 지금이 황금의 시간이라고 하면 요양시설에 입소된 분들이 23명당 한 명, 17명당 한 명의 생활지도원이 있는 게 아니라 제대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죠.

그러면서 요양시설 전체 기능에 대해 전반적인 고민을 해야죠. 여기에다 정신재활시설의 기능을 다 때려넣는다고 해서 그게 과연 요양시설의 변화일까? 저는 그게 근본적인 변화일지 고민이 돼요.”

-정신건강복지법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를 통과했어요.

“저는 국제적 기준에 맞춰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거부터도 얘기했지만 본인을 제외하고 본인의 신체를 구금하는 것 자체는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죠. 비자발·자발적인 입원은 국가 이외에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법입원제가 도입돼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옛날부터 얘기됐고요. 생각보다 의사들도 찬성인 거 아시죠? 의사들이 입원 제도에서 감당해야 할 기준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쪽도 찬성인데 문제는 정부에서 어떻게 하느냐죠. 예산을 훨씬 더 확보를 해야 되니까요.

요즘에 비대면이 일반화됐잖아요. 제가 오래전에 미국 갔을 때 병원 내 코트(법정)가 있어요. 화면 켜서 비대면으로 하는 거예요. 본인이 나오든가, 오기 힘들면 화면으로 본인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거죠. 우리나라가 IT 강국인데 제도들이 문제가 있는 게 있어요. 비영리 기관들은 과거에는 이사회나 운영위원회를 무조건 대면으로만 하게 했던 것처럼요, 반면 상법으로 진행되는 단체들은 비대면이 가능해요.

이처럼 우리도 경계를 넘어서 회원들이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게 중요하죠. 대면하면 좋은데 거리상 떨어지면 비대면으로 충분하게 본인 얘기를 하고요, 그리고 혼자 얘기하기 어려우면 옆에서 지원하는 시스템들을 갖추는 게 필요하죠. 국회 토론할 때 절차보조인과 관련해 그렇게 발표했습니다. 정신건강복지법 바뀌고,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 생기고, 조사원이 생겼잖아요. 조사원을 같이 가게 해야 된다. 절차보조인 사업을 하려면 의료기관에 조사원과 같이 가도록 하자.”

-절차보조인하고 조사원하고 같이?

“절차보조인은 정신장애인도 하고 누구나 하죠. 조사원들은 국공립병원에서 비자의 입원하신 분들이 내가 입원이 부적절하다고 얘기했거나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분들을 만나러 가잖아요. 제도적으로 이들에 대한 조사권이 있는 거니까, 그때 절차보조인하고 같이 가서 의료기관이나 정신요양시설에 있는 분들이 의사를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근데 안 받아줬어요(웃음).”

로비 구석에 있는 문 관장의 집무실. 그에게는 관장실이 따로 없다. (c)마인드포스트.


-정신건강복지법의 개정 방향은 옳다고 보시는가요.

“아까 얘기한 대로 해야 된다고 생각하죠. 대신에 예산을 마련해 줘야죠. 장식법이 안 되면 좋겠다. 2016년에 정신건강복지법 만들면서 4장 복지 서비스를 만들었지만 그 당시 제가 복지TV에서 인권변호사하고 토론할 때 그랬어요. 이거 잘못하면 장식법 된다.

우리는 법이 다 있고 장식이 다 있어요. 실행을 안 하는 것뿐이지. 당시에 정신건강복지법 만들어지고 하위 법령이 만들어지기 전이었거든요. 그래서 장식법이 되지 않아야 하고 하위 법령 만들어지면 한 번 더 불러달라고 그랬는데 안 불러줬어요. 그래서 그 문제점을 제가 한 번 더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못했습니다.”

-많은 정신장애인들을 만나셨는데 관장님이 보시기에 치유가 뭡니까?

“끈기와 끊기. 오랫동안 이 질병을 앓았던 분도 많고, 사회에서 편견과 싸우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끈기를 갖고 어려움을 같이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너무 빨리 좌절하지 말기. 끊기는 뭐냐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제도적 생각들이나 전통적인 생각들을 끊어야죠. 안 그러면 변화가 없어요.

샘솟는집에서 여러 사업을 할 때 다들 저걸 왜 하냐고 그랬거든. 기존의 방식이나 관성이 아닌 거잖아. 기존에 해왔던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통해 관성들을 끊고 새로운 것들을 같이 해보는 거. 그래서 끈기와 끊기가 지금 현재는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어떻게 늙어가고 싶습니까?

“나이 드신 회원들이 저한테 노인요양시설 안 하냐고 물어보세요. 왜냐하면 본인도 65세 되면 못 다니지 않냐. 다른 정신재활시설은 60세 되니까 못 들어가던데 그래요. 걱정하지 마시라 했죠. 70세여도 지역에서 살고 싶을 때까지 사셔라. 제가 노인요양시설을 할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 사회가 포용력을 가진 사회로 변화할 수 있도록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다만 제가 변화를 이렇게 할 만큼 영향력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가 왜 30년간 이 바닥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는지, 왜 관장실을 없앴는지, 기자는 조금 이해했다. 그건, 인간의 평등에 대한 그의 실천적 태도 때문이었다. 우리는 로비에서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출처 : e마인드포스트(http://www.mindpost.or.kr)